멕시코 티후와나에서 2시간 정도 차로 내려가면 엔세네다라는 휴양도시가 있습니다. 15-6년 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가기도 했지만 가족끼리 휴가차 다녀오기 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갱단에 대한 염려가 없었습니다. 거리에는 차들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해변의 길은 캘리포니아 1번 도로와는 사뭇 다른 드라이브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속도로 사용료를 페소로 주느냐, 달러로 주느냐를 가지고도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찰의 단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습니다. 경찰 자체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에 들어갔을 때 아내에게 여러 번 주의를 들었습니다. 멕시코에서 Stop은 Alto입니다. 똑같은 모양의 교통 표지판에 기록되어 있지만, 다소 풀어진 긴장 속에서 Alto(일단 정지) 사인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폭주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차’ 싶다가도 Alto를 보며 정지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어느덧 익숙해져 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시인과 촌장’ 하덕규목사님의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는 우리의 영적 속사정을 잘 표현하여 줍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사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자기 자신이 옳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는 당당하게 자신이 옳은 것으로 행동합니다. 그리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려고 합니다. 원하는 대로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각자 자신의 삶이니 어떠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조차 모두 청지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빠진 폭주하는 자동차 같은 우리입니다. 십자가의 계절에 십자가 앞에서 ‘Alto’(일단 정지 후 좌우를 살피듯 주님의 뜻을 돌아보고 움직이는)에 익숙해지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Alto’는 무엇입니까?